[베호의 일상] 주아의 모자
'Lockdown' 시작 첫 주의 금요일. 핀란드도 코로나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터라 정부에서 3주간 락다운 조치를 취했다. 이 기간 동안은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도 허용되지 않는다. 몇몇 레스토랑에서는 테이크 아웃 서비스만 제공한다.
코로나로 인해 작년 이맘때쯤부터 회사에선 재택근무 지시를 내렸었다. 왠지 프리랜서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했던 재택근무. 어린이집과 학교는 정상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호유와 두 딸은 모두 각자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곤 "이야~ 정말 자유로운 근무환경이겠네. 유럽 회사다운 결정이다."라고 부러운 듯이 말했었다.
MS Teams를 이용한 화상회의. 회의의 총량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걸 보면 아직 원격근무의 효율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자유로운 근무환경'이라는 겉으로 보기엔 부러워 보일만한 그림 뒤에는 이미 기업들이 마치 이런 코로나 상황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MS Teams'로써 기존의 회의를 대체하고, 각가지 새로운 툴(Remote Tool)들의 소개로 기존의 사무실에서 해왔던 일들을 효율이야 어쨌건 연속적으로 이어 갈 수 있도록 해줬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재택 근무 이후로부터는 회의에 참석 또는 주최해야 하는 경우가 적어도 2배는 늘어난 것 같다. 화면 너머로 가끔은 카메라도 켜지 않은 상대의 영문 이니셜만을 바라보며 한두 시간의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평소보다 에너지가 두 배는 고갈된 느낌이다.
에너지를 충전해 줄 한가지 소소한 즐거움이라면 호유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다. 이제 락다운으로 그 즐거움도 한동안은 만나지 못한다.
집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Schnitzel 맛집이라 점심을 먹으러 가끔 들른다.
아침을 먹고 애들 어린이집 준비를 시키는 중 둘째 녀석의 모자가 안 보였다. 어제보단 따듯해진 날씨지만 -4도이기에 털모자 없이 둘째를 보낼 수는 없었다. 첫째 딸에게 '딸기 까까'란 양보에 대한 보상과 '아린이의 머리가 얼 수도 있어'라는 공갈로 동생에게 모자를 양보하기로 하고 첫째에겐 다른 모자를 건네줬다.
'그 다른 모자' - 날이 추워지자 첫째에게 털이 북실한 모자를 하나 사주기로 호유와 약속했었다. 쇼핑을 하던 중, 호유와 난 고민을 한다. 지금 씌운 모자 사이즈가 딱 맞긴 한데 한 사이즈 크게 사면 내년에도 씌울 수 있을 것이라는, 딸들의 물건을 쇼핑할 때면 가끔 하게 되는 고민이다. 결국 우리는 한 사이즈 큰 모자를 주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한 며칠 뒤 어린이집에 주아를 데리러 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주아는 턱을 어디까지 쳐들고 먼 산을 바라보듯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에서 보낼 때는 분명히 모자가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다음날 주아를 데리러 갔던 호유도 같은 말을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뒤로 그 큰 모자는 서랍장에 고이 모셔 놨었다. 물론 큰 모자 때문에 딸아이의 머리가 1년 사이에 더 커지길 바라며 모셔뒀던 것은 절대 아니다.
문제의 '그 다른 모자' 큰 걸 사는 바람에 큰 딸은 의도치 않게 어린이 집에서 거만한 자세로 놀고 있는 친구들을 감시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주아가 아린이에게 모자를 양보하고 나니 서랍장에 넣어둔 '그 다른 모자' 말고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턱에 찍찍이를 딱 맞게 붙여주고 차에 태워서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언니는 동생을 위해서는 불편함도 조금은 감수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내 잘못되었던 결정을 언니라는 이름으로 지워보려 했다.
아린이 반에는 다른 학부모가 먼저 도착해 있어서 오늘은 주아를 먼저 데려다주고 아린이 반으로 돌아왔다. 아린이 서랍장에 아침에 집에서는 안 보였던 아린이 모자가 있었다. 아린이에게 빌려 줬던 모자를 들고 차로 돌아왔다. 지금 주아 반에 돌아가 선생님을 다시 부르면 아이들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바쁜 시간일 텐데 방해가 되지 않을지. 그렇게 찾아가서 비슷해 게 생긴 모자를 바꿔서 씌워 달라고 하면 너무 극성인 아빠로 보이진 않을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다 그냥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주아가 턱을 치켜든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턱을 들고 눈을 아래로 깐 채 어린이집 친구들과 숲에 산책을 나갈 주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 생각에도 차는 멈추지 않고 집까지 돌아왔다. 그 그림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는 차고에 차를 넣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차를 세우고 뒤늦은 걱정을 한다. '만약에 모자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숲에서 넘어지거나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기라도 하면 얼마나 미안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돌려서 어린이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침 회의에 조금 늦게 들어가는 건 대수가 아니다.
동생에게 빌려줬던 큰 딸의 모자.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길.
'근데 난 왜 이런 결정을 빠르게 내리지 못하는 걸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난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했었는지 몇 분만 지나면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할 고민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왜 이런 걸까? 지능 문젠가?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호유가 날이 추워지면 늘 하던 말이 생각이 난다. "오빠, 모자 쓰고 나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왠지 "안 추워"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가야 남자다워 보인다고 생각을 했던 걸까? "그래 알겠어."라는 간단한 대답 한번 쉽게 한 적이 없는 듯하다. 짧게 반성하곤 마음이 따듯해진다.